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야겠다 결심한 것은 두 달 전이다. 이사 온 집엔 외풍이 들었다. 찬 공기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나는 몇 달 전 그를 보자마자 생각했다. 사랑이 잔인한 이유는 끝이 나서가 아니라 계속 시작되기 때문이구나. 언제든 홀연히 사라질 수 있는 것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또 붙잡고 싶어진다. 나는 그 어떤 미래도 상상하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영화에 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결국 그 어떤 표현도 무의미하므로. 한꺼번에 떠오른 것들에 대하여. 양자경이 등장한 순간부터 눈물이 쏟아졌는데, 멈춰지지 않아서 멈추지 않았다. 140분 동안 울어본 적은 처음이어서, 무엇을 본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영화를 본 건가 다른 것을 본 건가.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잔인한 판타지다. 모든 ...
사랑은 구멍이다. 그러니까 나는 구멍을 사랑한다. 사랑이 깊어지면 구멍이 커지고, 구멍이 커지면 결국 텅 비어서 우주가 되고, 우주가 되면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 없어서 사랑이 된다. 나는 수 십 권의 책을 읽고, 수 백 개의 문제를 풀고, 수 천자의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지만, 사랑은 어쩔 줄 모르겠다. 그래서 사...
남자는 최선을 다했다. 이보다 더 잘할 수는 없었다. 남자는 여자의 모든 것을 알기 위해 노력했고,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여자가 이 길의 끝에서 이별을 말하게 될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여자는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 아팠다고 했다. 여자는 일처럼 최선을 다하는 거 말고, 그냥— 그냥 사랑하는 것을 원했다고 했다. 남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의 무책임하...
사랑이 영원하려면 결핍의 크기가 같거나, 아예 극명하게 달라야 했다. 온 세상이 부러워하고 찬양하는 사랑의 모양이 그랬다. 각자 결핍의 크기가 비슷해서 서로 아등바등 보듬거나, 결핍이 훨씬 작은 한쪽이 다른 쪽을 끌어안아주거나. 처음엔 남자의 결핍이 여자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남자는 여자에게 늘 너그럽고 솔직했다. 그리고 여자도 남자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
남자는 여자에게 모든 것을 해주고 싶었다. 물론 여자를 사랑해서기도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빚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런데 착실하게 연봉을 높여가던 여자가 서울 외곽에 함께 살 집을 먼저 사버렸다. 남자는 월세살이에서 벗어난 것이 기뻤지만, 한편으론 불편했다. 남자는 집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은 무조건 자신이 사야겠...
여자에겐 오직 보이는 것만이 중요했다. 보이지 않는 것들 — 학벌, 직업, 종교 등 — 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여자는 철저한 외모지상주의자였고, 그래서 그 누구보다 순수했다. 여자는 첫눈에 반해야만 사랑을 시작했다. 여자는 남자가 커피숍에 들어선 순간 사랑을 시작했다. 여자는 남자의 얇고 단정한 입술이 마음에 들었다. 너무 딱 맞는 옷을 입지 않은 ...
남자와 여자는 하염없이 걸었다. 35도를 넘는 뜨거운 날씨에도 둘은 꽉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땀이 고였다. 그 어떤 고난에도 손을 놓지 않겠다는 순진한 의지 같기도, 이상한 고집 같기도 했다. 남녀는 말없이 걷다 눈이 마주칠 때만 작게 소리 내 웃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단맛에 취한 여자는 남자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회사에 다닌 지 어느덧 반년이 되었다. 이 회사는 정말 좋은 곳이다. 친절한 동료들, 자유로운 근무 환경, 넉넉한 월급. 정말 놀라울 정도로 이상적인 회사인데, 나는 이상하게 고장 나버렸다. 책은 안 읽히고, 영화는 안 본다. 글도 안 쓴다. 못 쓴다. 퇴근 후엔 유튜브를 보다가 안 보다가, 쇼핑을 하다가 안 하다가, 채팅을 했다가 안 했다가를 반복한다. ...
선거 다음날이었다. 회사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나에게 대뜸 몇 번을 찍었냐고 물었다. 그는 선거 결과를 보고 울었다며 내게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다. 자신도 사실 한 정치인을 이렇게까지 지지해 보긴 처음이라며, 언젠가 그를 위해 일해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 열렬함의 근원이 궁금하여 여러 질문을 던졌다. 그의 답은 며칠 전 한 언론인이 라디오에서 말한 것과...
남자는 여자가 아니었다면 평생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했다. 남자는 평생 모든 것에 무관심했고 아무 데도 의욕이 없었다. 그냥 먹기 위해 살았고, 살기 위해 먹었다. 여자도 처음엔 그래 보였다. 표정은 무심했고 목소리는 단조로웠다. 조금이라도 열정 있고 센스 있는 직원이었다면, 벌써 두 달째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음료를 주문하는 남자에게 한 번은 아는...
낮가밤가. 남자는 낮에도 밤에도 가난한 스타일이었다. 여자는 커피숍 파트 타이머로 세후 97만 7000원을 벌었다. 남녀는 달아오른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남자는 성욕-식욕 반비례설을 여자에게 전파했다. 식욕을 해결하면 성욕은 사라질거란 뜻이었다. 4900원짜리 순두부 찌개는 라면 수프를 무려 두 개나 넣은 맛이 났다. 식욕은 채워지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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